
강택진(1892~1926)은 개성에서 풍기로 이주해 온 인물로서 일제 강점 전후 35년의 짧은 삶 가운데서 지역의 약자와 민족을 위해 큰 발자취를 남인 인물이다.
1892년 6월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난 그는 개항 이후 외세의 침략과 봉건 권력의 부패함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던 시기인 1894년 정감록의 영향을 받은 가족들에 의해 풍기 금계리로 이주해 왔다. 일제의 침략과 지배가 시작되는 가운데 10세에 아버지가, 19세 되던 해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개인의 슬픔과 망국이라는 민족의 아픔을 품고서 1911년 강택진은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와 상해지역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일시 귀국하여 동향을 파악한 후 상해 임정으로 돌아가 보고하였다. 다시 국내로 들어온 그는 의성에 기반을 둔 박시목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13도총간부를 조직하고 교섭부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리고 풍기의 이풍환, 순흥의 김교림 등에게 조선13도총간부의 이름으로 독립운동에 필요한 애국금 출연을 권유하는 권고문을 발송한 후 곽병도 등을 파견하여 모금을 실행하고자 하였다. 그 과정에서 1921년 3월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곽병도, 정호룡 등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강택진은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일제 고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평소 약했던 건강이 더욱 나빠졌다. 치료를 위해 1922년 5월 병보석으로 가출옥을 하게 된 그는 풍기로 돌아왔다. 이 시기는 전국적으로 노동자 농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풍기에서도 지주와 소작인 간의 갈등이 심해지는 가운데 소작인의 단결과 지주들의 횡포에 대항하기 위한 단체를 결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하였다. 지주로서 강택진은 강응진, 김동필과 함께 풍기소작조합 결성을 주도하였다. 풍기소작조합장의 위원장으로 형인 강응진이 선출되었다. 강택진은 요양 중 자신의 계급적 위치에 대해 반성하면서 1923년 4월 풍기소작조합에 약 9천평의 논을 기부하면서 지주로서의 기득권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동아일보 1924년 4월 26일자 신문에 「지주권을 포기하고 소작인 제군에게 고백하노라」라는 글을 투고하였다.
|

|
토지를 포기하야 작인에게 일임한 지주의 각성
경북 영주군의 지주 강택진씨
재산 전부를 작인에게 내주어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준 것도 아니고 그저 세상에 버렸습니다. 이제부터 양심의 비판대로 살아 볼까 해서 또는 남의 힘을 먹지 말고 제힘으로 살아 보려고 그랬습니다. 박애 평등 자유를 실현하려고 하면 적어도 먼저 소유욕을 없애버려야 하겠습니다”(투고 내용 중 일부)
『동아일보』 1923년 4월 26일 기사 제목과 내용 일부 발췌
|
강택진은 몸이 회복되자 본격적으로 민족운동에 가담하였다. 보통학교에 다니는 첫째는 형 강응진에게 맡기고 부인과 둘째 아이를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허름한 문간방에 세 들어 살면서 사회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그런 가운데 생계를 위해 아이스크림 장사도 하였다.
|

|
아이스크림
서늘한 소리이다. 그러나 이것을 외치고 다니는 사람은 비지땀을 흘린다. 제 등골에 땀 흘리지 않고 남의 힘으로 만든 것만 빨아먹는 생활이 양심에 부끄럽다 하여 자기 소유의 전답을 소작인에게 기부하고 맨손으로 나선 강택진씨는 땀을 흘리는 첫 생애로 이 ‘아이스크림’장사를 시작하였다. 사진은 포푸라 그늘에 아이스크림 통을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강씨이다.
동아일보』 1923년 6월 26일
|
강택진은 1923년 서울청년회 주최의 강연회에서 ‘농촌운동의 급선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전국적인 노동단체 결성을 위해 활동하는 가운데 경상도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1924년 4월 전국의 노동자 농민 조직을 총망라한 단체인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고, 강택진은 안동 출신 권오설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과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그는 표면적인 대중운동과 더불어 서울계의 비밀공산주의그룹에서도 활동하였다. 고려공산동맹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12월 예천에서 지방의 사회운동자 간친회에 참석하였다가 일제 경찰에 구금당하기도 하였다. 1925년 상주에서 경북사회운동자간친회에 참가하려던 70여명과 함께 경북 도내 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단체를 조직하고자 결의하였고, 이를 위해 경북사회운동자동맹을 조직하기 위한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주시하던 일제 경찰은 강택진을 경북사회운동자간친회건으로 구속하였다. 강택진은 8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후 1926년 2월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도 서울에서 조선사상동맹 준비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져서 1926년 7월 풍기로 귀향하여 요양을 하던 중 회복하지 못하고 10월 24일 사망하였다.
강택진의 장례식은 사회운동단체장으로 치러졌다. 당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세력 간의 분열과 대립 양상이 전개되는 상황에서도 강택진은 사상적으로 편향된 ‘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의 독립과 민중의 생활 개선을 위한 활동가로 평가되었기에 모든 세력이 힘을 합하여 장례를 거행하였다.
(「고 강택진씨 장의」, 『동아일보』 1926년 11월 3일)
장례식 당일 풍기 사람들뿐 아니라 서울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고, 그 장례 행렬이 십 리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일제 경찰의 감시 가운데 읍내로 들어가지 못하고 마을을 둘러 금계동 선영에서 사회단체장으로 진행되었다.
이듬해 1927년 10월 24일에는 1주기를 맞이하여 서울 견지동 천도교기념관에서 사회운동단체 연합 주최로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식을 개최하였다. 추도식 과정도 일제 경찰의 탄압 가운데 추도문 낭독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였다. 함께 활동했던 조선청년총동맹의 박형병은 ‘우리가 강택진을 애도함은 손목을 같이 잡은 동지이기 때문’이라고 하였고, 동생 강소천은 ‘나는 그를 형으로 보다 동지로서 더 잘 안다, 그가 만일 다른 나라 청년이었던들 삼십 오세라는 짧은 인생을 남기고 죽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러나 그는 조선 청년이기 때문에 삼십 오세를 일기로 죽었다’고 추모하였다.(『조선일보』 1927년 10월 26일)
(『조선일보』 1927년 10월 26일, 관련기사 사진)
이어 1928년 10월에는 강택진 2주기 추도회를 위해 풍기농우동맹회관에서 풍기 각 사회단체연합회가 개최되었다. 준비위원으로 이용균, 김진식, 박남양, 권영철, 안기석 등 5명을 준비위원으로 선출하여 10월 24일 풍기 금계동 일군회관에서 추도식을 거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추도식 당일 일제 경찰은 연합추도회를 갑자기 금지하였다. 이에 따라 추도식은 각 단체와 개인별로 거행되었다.
이러한 강택진의 공훈에 대하여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참고문헌
허종, 「강택진」, 『근대 대구경북 49인』 혜안, 1999.
『디지털영주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공훈전자사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