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특별시’라는 명칭에 매료되어 지인의 소개로 지난해 11월 성수동에서 열린 ‘지방특별시포럼 가을 소풍’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다양한 분야,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 지방 위기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제언들이 오가는 진솔한 분위기가 신선했다. 그렇게 지속가능한 지방의 생존 생태계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했던 그날의 열정이, 그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폭염 주의보 경고가 연일 울려대는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영주에서 대전까지 내달리게 했다.
지난 8월 30일, 대전 전통나래관과 소재동 일대에서 ‘지방을 하나의 커뮤니티로 엮는다’라는 주제로 열린 제2회 지방특별시포럼(지특포)은 단순히 학술적 논의를 넘어, 시들어가는 지방의 영혼을 깨우고 새로운 미래를 모색하려는 거대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전날 진행된 전야제는 지역을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대덕연구단지의 과학투어와 중구 골목 상권을 훑는 여정은, 도시의 역사와 산업, 생활이 어떻게 서로를 떠받치고 있는지 걸음으로 익히는 시간이었다.
이튿날 본 포럼에서는 디쓰리쥬빌리파트너스 정원식 심사역이 지특포에 대한 소개하는 것으로 이번 포럼의 문을 열었다. 그는 ‘지방도시 커뮤니티의 시작’이라는 제목을 발표하며 일자리, 교육, 문화 등 지방 인구 유출의 주요 원인들은 기존 정부 주도의 해결책으로는 한계에 봉착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정부와 자금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강조하며, '콜렉티브 임팩트(Collective Impact)'를 통한 공동체 구축의 필요성을 말했다. 그는 이 포럼을 통해 이러한 공동체를 위한 ‘싱크 탱크(Think Tank)’이자, 동시에 ‘두 탱크(Do Tank)’가 되어 실질적인 해법을 모색하고자 하는 비전을 제시하였다.
오프닝 키노트에서는 “왜 커뮤니티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였다.“좋은 계획과 좋은 사람과 돈이 있어도, 그것을 버티게 할 관계가 없으면 임팩트는 오지 않는다.” 한경구 지역균형발전연대회의 상임대표가 던진 한 문장은, 그날의 논의들을 관통하는 핵심 문장이 되었다.
이어진 라이브 토크에서는 더욱 생생한 현장의 사례들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옥이네’ 편집장의 “우리는 역사의 1%가 아니라, 역사를 만든 99%를 기록한다”는 한마디의 말은 청중들에게 커다란 울림이 주었다. 그는 ‘취재는 기사(記事)의 끝이 아니라 커뮤니티의 시작’라며 지역 커뮤니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주민의 목소리가 쌓이면 그 자체가 의제가 되고, 의제가 되면 행동이 따라오게 된다. 종이 위 문장 하나 하나가 마을을 움직이는 근육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 실행해가고 있는 ‘옥이네’는 로컬 저널리즘의 느리지만 견고하게 진화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출장을 마치고 바로 대전으로 달려온 제주 세화마을협동조합 양군모 마을PD가 연단에 올랐다. 그는 ‘지역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할 수 있는 분들이 모이신다는 말씀에 제일 우선적으로 달려 왔다.’라며 포럼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나타냈다. 제주 오름과 바다, 해녀와 당근이라는 지역의 자원이 워케이션 프로그램, 체험형 교육, 지역 일자리로 재탄생되는 과정을 따뜻한 한편의 마을 이야기로 들려주었다. 지역 자원을 단순 관광 상품화에만 그치고 있는 많은 지자체에 세화마을은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모두가 인정하는 마을사업이 아니면 80억 지원금도 반납하겠다”는 발언은 객석에서의 탄성을 자아냈다. 세화마을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모든 주민이 인정하는 마을 사업’이라며 사업으로 인해 단 한 명이라도 “서운해서 등지는 사람이 발생되면 안 된다”고 양PD는 강조했다.
세화마을의 성공은 거대한 예산이나 외부 전문가의 힘이 아닌, 주민 스스로가 문제를 인식하고, 가치를 지키기 위해 연대하며, 고유한 자원을 창의적으로 활용한 결과에 있었다. 이는 지방의 미래가 중앙의 거대한 정책이나 개발 계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민이 곧 해법’이라는 지극히 단순하고도 위대한 진리임을 깨닫게 했다. 세화마을은 지금도 멈추지 않고, 스텝2를 설계하며 지속가능한 미래를 꿈꾸고 있다.
간단한 점심과 티타임을 갖고 오후에는 액션랩 세션이 두 파트로 나누어 원하는 세션을 선택해 참여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세션들이 인근 카페들과 전통나래관에서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주변 거리를 거닐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되어 있었다.
‘사람과 지역커뮤니티가 여는 지역산업’ 세션에서는 정윤선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의 최근 분석 자료를 통해 지역산업의 현재와 방향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이어 김영임 전기초과학연구원 연구위원과 김륜희 토지주택연구원 연구위원과 주제 토론도 이어졌다.
정윤선 연구원은 한국 산업구조의 근간인 대기업 전속거래의 폐해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1970년대 대규모 국가산업단지 지정과 함께 대기업들이 이전하면서 울산, 구미, 창원 등 수많은 산업도시가 탄생했지만, 이는 결국 대기업을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이고 종속적인 '하도급 피라미드'를 만들어냈다며 대기업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지역 산업의 활력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대기업의 결정 하나에 지역의 운명이 좌우되는 불안정한 구조를 고착화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지역은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가? 정 박사는 대기업이 하지 않는 업종, 그리고 그 지역만이 고유하게 가진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 해법이라고 제안했다. 그는 대기업 중심의 하향식(Top-down) 산업정책에서 벗어나, 지역의 자연자원, 문화자원, 역사자원을 활용한 3차 산업을 특성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단순히 ‘관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제조업이 산업단지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일어났다면, 미래의 산업은 사람과 커뮤니티가 모여 만드는 새로운 시장에서 탄생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정 연구원은 지방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는 낡은 구조를 과감히 버릴 ‘용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기업 공장과 산업단지 유치라는 미련을 버리고, 지역만의 고유한 자산과 인재를 발굴하여 새로운 시장을 만들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다른 세션의 주제는 ‘지역난제 해결의 시작, 민관협력 거버넌스 구축’으로 이재훈 전 경남창업지원단장(현 AIM인베스트먼트 부대표), 문창용 대전시 환경국장, 이현숙 두두랩대표가 발표가 아닌 토론 진행방식으로 주제를 풀어나갔다.
이들은 지방의 난제가 행정의 단독 노력만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공공의 시스템적 한계, 민간의 전문성 부족, 시민의 주체성 부재라는 세 가지 문제가 충돌하는 현장에서, 오직 진심 어린 소통과 협력만이 새로운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재훈 부대표가 말한 ‘젖어들기’의 노력, 문창용 국장이 강조한 ‘기획과 실행’의 균형, 그리고 이현숙 대표가 보여준 ‘주민 주체성’의 강화는 모두 거버넌스라는 거대한 퍼즐을 완성하는 핵심 조각들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당장 눈에 띄는 화려한 성과를 내지 못할 수도 있지만, “반짝이지 않는 현장에서 꾸준히 정석대로 실천한다면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는 이현숙 대표의 말처럼, 지방의 미래는 작은 공동체 속에서 묵묵히 이루어지는 협력의 씨앗을 통해 싹을 틔울 것이다. 이처럼 이번 포럼은 그 씨앗을 심는 '끝이 아닌, 새로운 출발'의 자리였다.
마지막 클로징 키노트는 ‘산업, 커뮤니티, 지역 미래’를 주제로 마강래 중앙대교수와 박태웅 한빛미디어 의장의 강연이 이어졌다.
마강래 교수는 독일의 ‘히든 챔피언(Hidden Champion)’ 사례를 통해 지방의 위기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제시했다. 독일의 히든 챔피언은 세계 시장 점유율 상위권에 속하면서도,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강소기업을 뜻한다. 놀랍게도, 이들 히든 챔피언의 약 75%가 인구 5만 명 이하의 소도시에 본사를 두고 있다. 이들의 성공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마 교수는 히든 챔피언의 성공 뒤에 숨겨진 세 가지 핵심 원칙을 소개했다.
첫째, ‘사냥’이 아닌 ‘가꾸기’ 방식이다. 외부 기업을 유치하는 '사냥' 방식은 일시적 효과에 그칠 수 있다. 반면, 지역에서 태어난 작은 기업을 키우고 정착시키는 '가꾸기(gardening)' 방식은 장기적 지속 가능성을 보장한다. 히든 챔피언은 대부분 가족기업으로, 지역의 뿌리를 두고 성장하며 지역의 일원으로서 함께 숨 쉬는 존재가 되었다.
둘째, ‘작게 시작해 점점 키우는’ 방식이다. 처음부터 거대한 산업단지를 조성하는 대신, 소규모의 미니 클러스터(작은 혁신 거점)로 출발한다. 기업이 성장하면서 필요한 연구, 금융, 인재 지원 등을 하나씩 보태가며 확장하는 방식이다. 이는 마치 작은 씨앗이 튼튼한 나무로 자라나도록 물과 양분을 주는 과정과 같다.
셋째, ‘지역이 주인, 중앙은 조력자’ 방식이다. 지역이 스스로 주도적으로 기반을 만들고, 중앙정부는 지역이 홀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보완하는 조력자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중앙 주도의 하향식 정책이 아닌, 지역 주도의 상향식 발전 모델을 의미한다.
마 교수는 “지역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지방정부의 사고, “나는 주민과 함께 가야 한다”는 기업의 사고, 그리고 “나는 기업과 함께 가야 한다”는 주민들의 사고가 한데 모여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 모든 것을 묶는 끈이 바로 '커뮤니티'라고 정의했다.
박태웅 의장은 인공지능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며 강연을 시작했다. 그는 방대한 매개변수를 가진 챗GPT가 뇌의 작동 방식을 모방하고 있다며, “인공지능은 패턴을 매칭하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흥미롭게도 그는 인류의 뇌가 3천 년 전부터 크기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그 이유가 바로 ‘집단지성의 팽창’에 있다고 설명했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문자와 지식이 기록되고 공유되면서 개인의 뇌는 더 이상 모든 정보를 담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대신, 수많은 뇌가 자유롭게 연결되고 협력하는 ‘생태계’가 만들어지면서 인류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고 전했다.
그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픽사의 사례를 들며 이 원리를 구체화했다. 잡스가 픽사 직원들의 자유로운 대화를 보장하기 위해 화장실을 중앙에 배치한 일화는 ‘뉴런의 자유로운 결합’이 혁신을 낳는다는 그의 주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실리콘밸리가 성공한 비결도, 단순히 몇몇 천재들의 힘이 아닌, 수많은 창업가와 투자자, 개발자들이 자유롭게 정보를 교환하고 협력하는 생태계 덕분이라는 것이다.
박 의장의 강연은 지방 소멸이라는 난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지방의 문제는 단지 일자리나 인프라 부족의 문제를 넘어, 다양성과 창의성이 발현될 수 있는 '생태계'의 부재에서 비롯된 근본적인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는 “생태계의 다양성이 깨지면 혁신도 사라진다”고 경고하며, 지방이 가진 잠재된 가능성을 깨우기 위해서는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 지역 스스로의 ‘뉴런’들을 자유롭게 연결시켜야 함을 역설했다.
제2회 지방특별시포럼은 소멸이라는 단어로 지칭되는 지방의 위기 앞에서, 지방마다의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함께 하는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포럼은 단순히 문제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제주 세화마을과 옥천 '월간 옥이네'와 같은 성공 사례를 통해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거버넌스와 지역 산업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해 '실행'의 방향도 제시했다.
마강래 교수가 말한 기업 '사냥이 아닌 가꾸기', 그리고 박태웅 의장이 말한 '뉴런의 자유로운 결합'을 통한 커뮤니티의 힘은 결국 한 목소리였다. 지방의 미래는 더 이상 중앙 정부의 시혜적 지원이나 거대 담론에 있지 않으며, 지역민과 기업, 그리고 지자체가 서로를 '동반자'로 인정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생태계'를 만들어가는 데 달려있다.
포럼의 마지막은 "지역에 일자리가 없다"는 이야기를 넘어 "개인이 브랜드가 되어 그 지역을 바꾸는 것이 새로운 일자리 창출"이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로 마무리되었다.
지방도시는 더 이상 대체 가능한 부품이 아니다. 대체 불가능한 원천이 되어야 한다. 그 원천의 다른 이름이 커뮤니티다. 커뮤니티는 우정과 선의의 동아리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이며, 지역 경제를 작동시키는 플랫폼이다. 그 플랫폼의 첫 번째 규칙은 느리지만 단단한 관계를 설계하는 일, 두 번째 규칙은 실패가 흡수되는 생태계를 가꾸는 일, 세 번째 규칙은 성공이 독점되지 않도록 다시 나누는 일이다.
지방의 문제는 결국 사람의 문제이며, 그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고, 그 마음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고, 그 공동체가 변화의 주체가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지방의 부흥이 시작될 것이다. 제2회 지방특별시포럼은 한국 지방의 잠재력을 일깨우고, 거대한 전환의 시대를 향한 첫걸음을 떼는 상징적인 자리로 기억될 것이다.
사진제공 : 지방특별시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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