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기후 변화는 단순한 환경 문제를 넘어 국가의 생존과 안보를 위협하는 가장 복합적이고 시급한 과제로 부상했다. 지구 평균 기온의 상승은 기상 패턴의 예측 불가능성을 높이고 있으며, 이는 농업 생산성의 급격한 변화, 자연재해의 대형화, 그리고 글로벌 공급망의 붕괴 위험으로 직결되고 있다. 이러한 다층적인 위기 상황에서 기상청의 역할에 대한 기대 또한 어느때보다 커지고 있다.
이번 ‘링크人영주’는 이런 기후 문제에 따른 농업 재배 환경의 변화를 직접 체감하고 있는 우리 지역이 꼭 만나야 할 기후와 농업의 전문가를 만나보기로 했다.
기상청 연구사로 공직에 입문하여 문재인 정부 초대 기상청장(제12대)에 올라, 대한민국 기상·기후 정책의 최전선에서 이론과 실무를 통합해 온 남재철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특임교수를 지난 17일 서울대학교에서 만났다.
남재철 전 청장은 기상청 차장, 수도권기상청장, 국립기상과학원장 등 기상청 내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치며 전문성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특히 그는 서울대학교 농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동 대학원에서 기상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농업'과 '기상'이라는 두 가지 핵심 영역을 학문적으로 융합한 독보적인 이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남극 세종기지 월동대원으로서의 극한 체험, 기상청장 재임 시 포항 지진 대응과 같은 위기관리 사례, 현재 그가 주력하고 있는 기후 변화와 식량 안보의 상관관계 등에 대해 깊은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는 2010년 '아랍의 봄' 사태와 식량 가격 폭등의 인과관계를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기후 변화로 인한 국내 작물 재배지도의 변화(사과 재배지 북상 등)와 이에 대응하기 위한 '농업기상재해 조기경보시스템'의 도입 필요성을 역설해왔다. 그와 기후와 농업, 식량안보에 대해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Q. 청장님의 공식 프로필에는 출생지가 '안동'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다수의 언론 인터뷰와 기고문에서는 '고향 영주'를 각별히 강조해 오셨습니다.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낸 영주는 청장님께 어떤 공간적, 정서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당시의 기억에 남는 추억은 무엇입니까?

영주중학교, 1975년 사진,
A. 네, 행정 서류상의 출생지는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이 맞습니다. 그러나 제 자아와 정서의 토양을 형성한 실질적인 고향은 영주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굴곡과 궤를 같이하는 '이주'와 '정착'의 역사였습니다. 제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3학년이던 1970년대 초반, 국가 주도의 경제 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안동댐 건설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이 거대한 토목 공사로 인해 제가 태어난 고향 마을은 수몰지구로 지정되었고,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은 실향민이 되어야 했습니다.
수몰 이후 저희 가족은 잠시 경북 봉화군 명호면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나 자녀 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셨던 부모님께서는 "자식들을 시골에만 둬서는 안 된다"는 결단을 내리셨고, 당시 경북 북부의 교육 및 교통의 중심지였던 영주시로의 이주를 감행했습니다. 그때부터 영주는 저에게 제2의 고향이자,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베이스캠프가 되었습니다.
저는 영주의 상징과도 같은 철탄산 아래에서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영주국민학교와 영주중학교를 졸업하며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던 시기를 이곳에서 보냈기에, 제 기억 속에 각인된 고향의 풍경은 안동의 수몰된 마을이 아닌 영주의 골목길과 능선들입니다. 비록 고등학교는 안동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영주는 언제나 제가 돌아와 쉴 수 있는 마음의 안식처였습니다.
더욱이 영주는 저의 개인적 인연이 촘촘히 얽혀 있는 곳입니다. 제 아내 역시 영주여고를 졸업한 영주 토박이이며, 처가가 영주시 관사골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인연은 제가 공직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그리고 퇴임 후인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저는 재경 영주 향우회 부회장직을 맡아 출향 인사들과 교류하며 영주 발전을 위해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저에게 영주는 단순한 거주지 이상의 의미, 즉 제 정체성의 뿌리가 내려진 정신적 고향입니다.
Q. 영주는 소백산 자락의 청정한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도시입니다. 이러한 영주에서의 삶이 훗날 청장님께서 기상학자의 길을 걷게 된 데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A. 영주의 맑은 공기와 소백산의 웅장한 자연 속에서 자라며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키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기상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계기는 낭만적인 자연 감상이 아닌,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목격한 식량 위기의 참혹한 현실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성장하던 1960~70년대 대한민국은 한국 전쟁의 상흔을 딛고 일어서려는 처절한 몸부림의 시기였습니다. '보릿고개'라는 말이 일상어였을 정도로 빈곤은 보편적인 현상이었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서 제가 가질 수 있었던 가장 현실적이고도 원대한 꿈은 "훌륭한 농학자가 되어 우리 국민들을 배불리 먹이는 데 기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명감을 안고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당시 농과대학) 농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대학 시절, 저는 대한민국 농업사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목격했습니다. 1970년대는 박정희 정부의 주도하에 통일벼가 개발·보급되면서 쌀 자급을 달성한 녹색혁명의 전성기였습니다. 통일벼는 열대성 인디카 품종과 온대성 자포니카 품종을 교배하여 수확량을 획기적으로 늘린 기적의 볍씨였습니다. 그러나 이 품종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태생적으로 열대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 저온에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었습니다.
1980년 여름, 한반도에는 기록적인 이상 저온 현상이 덮쳤습니다. 1979년부터 조짐을 보이던 기후 불안정은 1980년에 정점을 찍었고, 통일벼는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당시 쌀 생산량이 30%나 급감하면서 국가는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식량 자급의 꿈은 일시에 무너졌고, 정부는 부족한 쌀을 메우기 위해 막대한 외화를 들여 쌀을 수입해야 했습니다. 저는 이 사태를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유전공학적으로 우수한 품종을 개발하더라도, 하늘의 기상을 읽고 대비하지 못하면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때 수업을 진행하시던 교수님께서 "너희들 중에 누군가는 기후 변화와 농업 기상학을 전공해야 한다. 이것이 미래 농업의 핵심 승부처가 될 것이다"라고 역설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제 가슴에 불을 지폈습니다. 저는 농학이라는 기반 위에 기상학이라는 날개를 달기로 결심했고, 대학원을 기상학과로 진학하여 농업과 기상을 융합하는 연구에 매진하게 되었습니다.
영주에서의 삶은 저에게 '선비 정신'이라는 또 다른 자산을 주었습니다. 영주는 소수서원이 있는 선비의 고장입니다.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절제하는 선비 정신은 훗날 제가 공직자로서, 그리고 과학자로서 데이터를 다룰 때 겸손함을 잃지 않게 해주는 내면의 지침이 되었습니다. 기상청장 재임 시 간부들과 함께 소수서원에서 선비 문화 체험을 진행한 것도 이러한 정신적 유산을 조직 문화에 소개하고자 했던 노력이었습니다.
Q. 첫 아이가 태어난 지 불과 보름 만에 남극 세종기지 3차 월동대로 떠나셨다는 일화는 기상청 내에서도 전설처럼 회자됩니다. '남극에서 살아본 첫 기상청장'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오이 소주' 일화는 극한 환경 속 동료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상황과 경험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1990년 제3차 남극세종과학기지 월동대, 기상연구
A. 1988년 남극 킹조지섬에 세종과학기지가 준공된 직후, 저는 기상청(당시 중앙기상대) 연구사로서 제3차 월동연구대에 선발되었습니다. 당시 제 개인적으로는 첫 아이가 태어난 지 보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아내와 핏덩이 같은 아이를 두고 떠나는 발걸음은 천근만근이었지만, 미지의 대륙 남극에서 기상 데이터를 수집하고 국가 위상을 높인다는 과학자로서의 사명감이 저를 이끌었습니다.

1990년 남극세종온실 모습
남극의 월동 생활은 14명의 대원들이 1년 동안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채, 영하 수십 도의 혹한과 블리자드, 그리고 칠흑 같은 극야를 견뎌내야 하는 극한의 생존 미션입니다. 기지에는 기상, 해양, 생물, 지질을 연구하는 과학자 4명과 기지 운영을 담당하는 유지반원, 조리사, 의사, 대장 등 총 14명이 함께 생활했습니다.
가장 큰 고통은 '신선한 음식의 부재'였습니다. 12월, 남극의 여름에 기지에 들어가면서 1년 치 식량을 싣고 가지만, 신선한 채소나 과일은 한두 달이면 바닥이 납니다. 나머지 10개월은 통조림, 냉동식품, 건조 식자재에 의존해야 합니다. 인간에게 먹는 즐거움이 사라진다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 요인이었습니다.
이때 기지 대장님께서 제가 농대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남극에서 온실을 한번 운영해 보라"는 특명을 내리셨습니다. 남극의 환경에서 식물을 키운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었습니다. 일조량이 부족하고 난방이 어려운 조건이었지만, 저는 동료들에게 푸른 채소를 먹이겠다는 일념으로 온실 관리에 매달렸습니다.
지극정성으로 돌본 끝에 오이, 깻잎, 상추, 쑥갓 등을 수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밖은 눈보라가 치는데 온실 안에서 초록 생명이 자라는 모습은 그 자체로 대원들에게 심리적 치유가 되었습니다. 특히 기지 앞바다에서 낚시로 잡은 남극 빙어 등을 회로 떠서, 제가 키운 깻잎에 싸 먹을 때 대원들이 보여준 환호성은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오이 소주' 사건은 제한된 자원을 어떻게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배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었습니다. 어렵게 키워낸 오이가 3개 수확되었는데, 14명의 건장한 남성들이 나눠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우리는 진지한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이 오이 3개를 어떻게 먹어야 14명 모두가 만족할 수 있을까?" 무려 3시간에 걸친 토론 끝에 도출된 솔루션이 바로 '오이 소주'였습니다. 주전자에 소주를 붓고 오이를 채 썰어 넣으면, 오이의 상큼한 향이 술 전체에 퍼져 14명 모두가 오이의 맛과 향을 향유할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날 밤, 우리는 오이 향이 배어든 소주잔을 기울이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서로에 대한 동지애를 확인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술자리가 아니라, 극한의 고립 상황에서 집단의 결속력을 다지는 고도의 심리적 의식이었습니다.
Q. 남극에서의 1년은 훗날 조직을 이끄는 리더로서의 철학 정립에 어떤 구체적인 영향을 미쳤습니까?
A. 남극 월동대는 '폐쇄된 소규모 사회'의 완벽한 모델입니다. 14명의 대원들은 1년 365일, 24시간 내내 같은 공간에서 얼굴을 맞대고 지내야 합니다. 피할 곳이 없는 공간적 제약은 인간관계의 밀도를 높이는 동시에 갈등의 강도를 증폭시킵니다. 사소한 말 한마디, 식사 당번 문제, 청소 습관 차이 등이 걷잡을 수 없는 감정싸움으로 번지기도 합니다. 심한 경우 대원들끼리 파벌이 갈리거나 며칠씩 침묵 수행을 하는 냉전 상태가 지속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저는 연령이나 직급으로 볼 때 대원들 중 딱 중간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향상 갈등을 조장하기보다 중재하는 것을 선호했기에 자연스럽게 '소통의 허브'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상급자의 지시가 하급자에게 부당하게 느껴질 때, 혹은 하급자의 불만이 상급자에게 전달되지 않을 때, 제가 중간에서 완충재 역할을 하며 오해를 풀어나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리더십의 본질에 대해 깊이 깨달았습니다.
첫째, '경청'의 힘입니다. 갈등 상황에서 논리적인 시비를 가리는 것보다, 당사자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만으로도 문제의 80%는 해결된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둘째, '식탁 공동체'의 중요성입니다. 앞서 언급한 온실 채소나 오이 소주처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긴장을 푸는 자리는 그 어떤 회의나 훈시보다 강력한 조직 융합의 수단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제가 훗날 기상청 국장, 차장, 청장으로 조직을 이끌 때 핵심적인 리더십 원칙이 되었습니다. 거창한 비전 제시도 중요하지만, 직원들의 고충을 세심하게 듣고, 따뜻한 밥 한 끼를 함께하며 정서적 유대감을 쌓는 스킨십 리더십을 실천하려 노력했습니다. 남극은 저에게 리더십이란 '앞에서 나를 따르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함께 견뎌주는 것'임을 가르쳐 준 인생의 학교였습니다.
Q. 교수님은 연구사 공채 출신으로는 최초로 기상청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과학자의 입장과 고위 행정가의 정무적 판단 사이에는 필연적인 간극이 존재했을 텐데, 두 관점이 충돌할 때 어떤 원칙으로 해법을 찾으셨습니까?
A. 정확한 지적입니다. 저는 1990년 기상청에 입사한 이래 줄곧 예보, 기후, 관측 등 실무 부서와 연구 파트에서 경력을 쌓아온 정통 '기상맨'입니다. 연구사 출신이 차관급인 기상청장에 임명된 것은 기상청 역사상 제가 처음이었습니다. 과학자로서 데이터를 분석하고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데는 익숙했지만, 국회 예산 확보, 타 부처와의 업무 조율, 언론 대응과 같은 고도의 정무적 역량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실제로 국정감사장에서 의원들의 질타를 받거나 언론의 비판적 보도에 직면했을 때 심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2017년 대한민국안전포럼 행사
그러나 기상청은 본질적으로 '과학기술 부처'입니다. 정치적 논리보다는 과학적 팩트와 기술적 정확성이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곳입니다. 저는 위기 상황일수록 저의 정체성인 '전문성'에 집중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믿었습니다. 정치적 수완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하기보다, 데이터가 말해주는 진실을 국민에게 가감 없이 전달하고 기술적인 솔루션을 제시하는 것이 기상청장의 본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2017년 11월 15일 발생한 포항 지진(규모 5.4) 대응입니다. 2016년 경주 지진 이후 국민들의 지진에 대한 공포감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포항 지진 발생 당시, 기상청은 지진 조기 경보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여 운용 중이었습니다.
저는 지진 발생 직후, 이 시스템이 정상 작동하여 국민들에게 긴급재난문자가 발송되었는지를 최우선으로 챙겼습니다. 다행히 개선된 시스템 덕분에 지진 발생 19초 만에 재난문자가 발송되었습니다. 이는 서울 등 원거리 지역에서는 지진의 진동(S파)이 느껴지기도 전에 문자가 도착했음을 의미합니다. "문자를 보고 나서 땅이 흔들렸다"는 국민들의 증언이 이어졌고, 이는 기상청의 기술적 신뢰도를 회복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포항 지진 당시 액상화 현상 우려가 제기되었을 때도, 섣부른 부인이나 긍정 대신 즉각적인 현장 조사와 과학적 분석을 지시하여 팩트 기반의 커뮤니케이션을 유지했습니다. 비록 정무적인 스킬은 부족했을지 모르나, 과학적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원칙 대응이 결국 국민의 신뢰를 얻는 길임을 확인한 사례였습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성공적인 기상지원
Q. WMO(세계기상기구) 대기과학위원회 부의장 및 집행이사 당선 등 국제 무대에서도 분명한 족적을 남기셨습니다. 글로벌 기상 리더 그룹에서 바라본 한국 기상청의 위상은 어떠했습니까?

세계기상기구 집행이사회 참석
A. 국내에서는 잦은 기상 이변과 예보 엇박자로 인해 기상청이 비판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국제 사회, 특히 WMO 내에서 한국 기상청의 위상은 실로 대단합니다. "한강의 기적"이 경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상 분야에서도 일어났다고 평가받습니다.
한국은 삼면이 바다이고 산악 지형이 70%를 차지하는 복잡한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편서풍 지대에 위치하여 기상 변화가 매우 역동적이며, 태풍, 장마, 폭설, 폭염 등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거의 모든 종류의 기상 재해를 겪는 '기상 백화점'과 같은 나라입니다. 이러한 험난한 조건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기상 기술을 단련시키는 최고의 훈련장이 되었습니다.

한중 기상협력회의
현재 한국 기상청은 다음과 같은 객관적인 지표에서 세계 톱티어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 독자 기상 위성 보유국: '천리안' 위성을 쏘아 올림으로써 세계에서 7번째로 독자적인 정지궤도 기상 위성을 보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는 태풍의 이동 경로나 서해상의 급격한 구름 발달을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는 '눈'을 가졌음을 의미합니다.
▲ 수치예보모델(KIM) 자체 개발: 전 세계에서 자국 고유의 수치예보모델(날씨 예측 소프트웨어)을 보유한 나라는 10개국이 채 되지 않습니다. 한국은 한국형 수치예보모델(KIM)을 개발하여 현업에 적용 중이며, 이는 기상 기술 자립의 정점을 찍은 성과입니다.
▲ WMO(세계기상기구) 내의 리더십: 한국은 기상 기술 공여국으로서 개발도상국 기상청 직원들을 초청해 교육하고, 기상 장비와 시스템을 지원하는 ODA(공적개발원조) 사업을 활발히 펼치고 있습니다.
유럽중기예보센터(ECMWF)나 영국, 미국, 일본 등 전통적인 기상 강국들과 비교했을 때, 한국의 종합적인 기상 기술력은 세계 6~7위권으로 평가받습니다. 특히 IT 기술을 접목한 기상 정보 전달 시스템, 사용자 맞춤형 서비스 분야에서는 세계를 선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WMO 집행이사로서 이러한 한국의 위상을 바탕으로 국제 기상 정책 결정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Q. 서울대 농학과에서 출발해 기상청의 정점에 오르셨고, 지금은 다시 학교로 돌아와 '기후 위기와 식량 전쟁'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농업-기상-농업'으로 회귀하는 여정을 통해 도달한 청장님만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A. 제 인생의 궤적은 기후 변화가 우리 삶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 즉 '먹거리'를 어떻게 위협하는지를 목격하고, 데이터를 통해 증명하고, 다시 그 위험성을 경고하는 과정이었습니다. 1980년 냉해로 인한 쌀 흉작을 보며 '기상이 식량 생산의 절대 변수'임을 깨달았고, 기상청에서의 30년은 그 변수가 인류가 통제할 수 없는 방향으로 폭주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명확합니다. "기후 위기는 곧 식량 위기이며, 이는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닌 국가 안보의 핵심 문제이다."
인류의 생존을 지탱하는 3대 요소는 식량(Food), 에너지(Energy), 물(Water)입니다. 이를 'FEW Nexus'라고 합니다. 에너지는 화석 연료가 고갈되더라도 태양광, 풍력, 원자력 등 대체재가 존재합니다. 물은 에너지만 충분하다면 바닷물을 담수화하여 확보할 수 있는 기술이 있습니다. 그러나 식량은 대체재가 없습니다. 인공적으로 합성하는 데 한계가 있으며, 부족하면 즉각적인 기아와 생존 위협으로 이어집니다. 역사적으로 식량 부족은 전쟁과 폭동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특히 대한민국은 식량 안보 측면에서 매우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쌀의 자급률은 90% 이상을 유지하고 있어 국민들이 체감하지 못하지만, 밀(0.7%), 옥수수(3.5%), 콩(26.7%) 등 주요 곡물의 자급률은 처참한 수준입니다. 전체 곡물 자급률은 20%를 밑돌아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에 속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반도체와 자동차를 팔아 번 돈으로 해외에서 값싼 농산물을 사 먹는 구조에 안주해 왔습니다. 그러나 기후 위기가 심화되면 돈이 있어도 식량을 구할 수 없는 시대가 올 수 있습니다. 식량 수출국들이 자국의 안보를 위해 수출 빗장을 걸어 잠그는 '식량 보호주의'가 현실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Q. 2010년 '아랍의 봄' 사태를 예로 들어, 낮은 곡물 자급률이 사회 붕괴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메커니즘과 대한민국이 취해야 할 시급한 조치는 무엇입니까?
A. 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되어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등 중동 전역을 휩쓴 민주화 운동인 '아랍의 봄'은 표면적으로는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이었지만, 그 기저에는 '빵(식량)' 문제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사태의 발단은 2010년 여름, 러시아와 동유럽 곡창지대를 강타한 기록적인 폭염과 가뭄이었습니다. 세계적인 밀 수출국인 러시아는 자국의 식량 수급을 안정시키기 위해 밀 수출을 전격 금지했습니다. 이로 인해 국제 밀 가격은 단기간에 100% 이상 폭등했습니다. 밀 수입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았던 튀니지와 이집트 등 아랍 국가들은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주식인 빵 가격이 3배 이상 치솟자,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저소득층의 생계가 붕괴되었습니다. 굶주린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빵을 달라"고 외친 것이 정권 퇴진 운동으로 확산된 것입니다. 이는 기후 재난(러시아 가뭄) → 식량 가격 폭등 → 사회적 소요 및 정권 붕괴로 이어지는 '나비 효과'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대한민국도 이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한국은 세계 7위의 곡물 수입국입니다. 만약 국제 공급망에 차질이 생겨 밀가루 가격이 폭등한다면, 라면, 빵, 과자 등 가공식품 가격이 연쇄적으로 상승할 것입니다. 상위 소득 계층은 이를 감당할 수 있겠지만, 소득의 대부분을 식료품비로 지출하는(높은 엥겔 지수) 저소득층 약 300만 명은 심각한 생존 위기에 내몰릴 수 있습니다. 이는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내부 갈등을 유발하는 뇌관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시급히 취해야 할 조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 공공비축제도 확대: 쌀 위주의 비축을 넘어 밀, 콩 등 주요 수입 곡물에 대한 국가 비축 물량을 획기적으로 늘려야 합니다. 유사시 최소 3~6개월을 버틸 수 있는 완충 물량을 확보해야 합니다.
▲ 해외 곡물 조달 시스템 구축: 민간 기업에만 맡겨둘 것이 아니라, 포스코인터내셔널이나 하림 등 곡물 터미널을 보유한 기업들과 협력하여 해외 현지에서 직접 곡물을 생산·유통·반입할 수 있는 독자적인 공급망을 확보해야 합니다.
▲ 국내 자급 기반 확충: 논에 벼 대신 타작물(밀, 콩, 가루쌀)을 재배하도록 유도하는 직불금 제도를 강화하고, 기후 적응형 신품종 개발에 R&D 예산을 집중해야 합니다.
Q. 농업이 주력 산업인 영주 지역도 기후 변화로 인해 사과 재배지가 북상하는 등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지역 차원에서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구체적인 기술적, 정책적 방안은 무엇입니까?
A. 한반도의 기온 상승 속도는 세계 평균의 약 2배에 달합니다. 지난 100년간 약 1.8도 상승했습니다. 이로 인해 농작물 재배 적지가 빠르게 북상하고 있습니다. 과거 '대구 사과'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사과 주산지는 영주, 문경, 봉화를 거쳐 현재는 강원도 양구, 정선, 철원 등 휴전선 인근까지 올라갔습니다.
영주 역시 머지않아 고품질 사과 재배의 한계선에 직면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가져야 합니다. 이에 대한 대응은 '품종 전환'과 '정밀 농업 기술 도입' 두 가지 트랙으로 가야 합니다.
가장 시급하고 효과적인 대안으로 '농업기상재해 조기경보시스템'의 전면적인 도입을 제안합니다. 이는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최첨단 서비스로, 기상청이 제공하는 거시적인 동네 예보(5km 격자)를 농장 단위(30m 격자)로 세분화하여 제공하는 기술입니다.
▲ 작동 원리: 지형적 특성(고도, 경사, 방향)을 반영하여 내 과수원의 기온, 풍속, 일사량을 정확하게 예측합니다. 여기에 작물의 생육 단계(발아기, 개화기, 비대기 등) 정보를 결합하여 맞춤형 위험 정보를 생산합니다.
▲ 서비스 예시: "내일 새벽 귀하의 과수원 최저기온이 -2도로 예상되어 사과꽃 냉해 위험이 '심각' 단계입니다. 즉시 미세 살수 장치를 가동하고 방상팬을 돌리십시오."라는 구체적인 행동 요령을 모바일 문자로 발송합니다.
▲ 경제적 효과: 이 시스템을 도입할 경우 기상 재해로 인한 피해를 사전에 예방하여 농가 피해액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도입 시 연간 약 1,140억 원의 경제적 손실 절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영주시는 이 시스템을 지역 내 모든 과수 및 특용 작물 농가에 보급하고, 농업기술센터와 연계하여 데이터를 모니터링하는 스마트 농업 체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또한, 장기적으로는 기후 변화에 강한 신품종 도입과 아열대 작물 시범 재배 등을 통해 농업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Q. 마지막으로 교수님의 향후 계획과 영주 시민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A. 저는 30년 가까운 공직 생활 동안 국가로부터 과분한 혜택과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제가 쌓은 전문 지식과 경험을 사회에 환원하는 '재능 기부'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대학 강단과 각종 강연을 통해 기후 위기의 심각성과 식량 안보의 중요성을 알리는 '기후 전도사' 역할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특히 제 마음의 고향인 영주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영주시의 기후 변화 적응 대책 수립이나 스마트 농업 전환 정책에 자문 역할을 하며 고향 발전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영주 시민 여러분, 그리고 국민 여러분. 기후 변화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식탁을 위협하는 현재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학적 데이터에 기반하여 미리 대비하고, 농업 시스템을 혁신한다면 이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지혜를 모아 지속 가능한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갑시다. 저 남재철도 언제나 그 길에 함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의 삶은 '농업'에서 시작해 '기상'을 거쳐 다시 '식량 안보'로 귀결되는 궤적을 보여준다. 이는 "하늘의 변화(기상)를 읽지 못하면 땅의 소산(식량)을 지킬 수 없다"는 명료한 진리를 대변한다. 그의 통찰은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생존을 위한 나침반이 되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