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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일 2026-07-20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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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人영주] '영주가 키운 장군' 김태업이 말하는 진정한 애국

영주의 선비 정신, 세계 안보의 중심에 서다

기사입력 2026-01-27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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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의 선비 정신, 세계 안보의 중심에 서다

경상북도 영주시 창진리, 엄격한 가풍 속에서 자란 한 소년이 있었다. 초등학교 선생님의 격려 한마디에 군인의 꿈을 품었던 그 소년은 훗날 대한민국 육군 준장이 되어, 한국측 장성으로서는 최초로 주한미군 제8군사령부 부사령관이라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했다.

 

김태업 장군은 33년간의 군 복무 중 절반 이상을 한미 연합 작전과 국제 평화 유지 활동에 헌신한 전략통이자 군사 외교관이다. 특히 그가 보여준 갈등 해결의 지혜와 현지 주민을 향한 겸손의 리더십은 전 세계 파병 부대들 사이에서 ‘PKO(유엔 평화유지활동)의 전설로 회자된다.

 

퇴역 후에도 미8군 정치·군사 고문으로서 한미 간의 보이지 않는 가교 역할을 수행했던 김 장군은,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의 뿌리가 고향 영주의 선비 정신에 있다고 강조한다.


평택의 한 카페에서 소백산의 정기를 품고 세계 무대를 누비는 김태업 장군과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 그의 안보 철학과 고향 영주를 향한 진심 어린 고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Q. 장군님,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고향 매체와 인터뷰를 하시게 되었는데요. 먼저 영주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추억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장군님께 영주는 어떤 의미입니까?

A. 반갑습니다. 영주를 떠난 지는 오래되었지만, 제 마음의 고향은 언제나 영주입니다. 저는 영주 창진리의 함창 김가 집성촌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까지 그곳의 산천을 뛰놀며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서천교 밑에서 친구들과 피라미를 잡고, 철탄산에 올라 아카시아 꽃을 따먹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제게 고향은 단순히 태어난 곳이 아니라, 제가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정서가 녹아있는 공간입니다. 타지 생활을 오래 하고 해외 파병지를 전전하면서도, 힘들 때면 소백산의 넉넉한 품과 영주의 맑은 공기가 늘 그리웠습니다. 지금도 길을 가다 영주 사과 박스만 봐도 반가움에 가슴이 뛸 정도로 영주는 제 존재의 근간입니다.
 

Q. 영주는 '선비의 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장군님의 엄격한 군인 정신과 청렴한 공직 생활에 고향에서 배운 가르침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요?

A. 창진리 집성촌에서 자라면서 어르신들로부터 유교 사상의 핵심인 효()와 충(), 그리고 사물의 이치를 배우며 자랐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천자문을 익히며 부모님께 공경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법을 체득했지요. 이러한 선비 정신의 요체는 도덕성책임감입니다.

 

 

군 생활은 상관과 국가에 대한 무한한 충성, 그리고 결점 없는 도덕심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곳입니다. 어린 시절 영주에서 보고 느꼈던 어른들의 삶과 부모님의 가르침이 제 군 생활의 든든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특히 어려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선비의 절개는 제가 군의 주요 보직을 수행하며 결단을 내려야 할 때마다 가장 큰 힘이 되었습니다.

 

Q. 군인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영주중앙초등학교 시절의 일화가 궁금합니다.

A. 사실 저는 초등학교 시절 꽤나 장난꾸러기였습니다. 그런데 영주서부초 학교 재학 시절, 선생님들께서 저를 보시더니 "태업이는 나중에 육군사관학교에 가면 정말 잘 어울리겠다"라고 자주 격려해 주셨습니다. 당시에는 철없는 어린아이였지만, 선생님들의 그 한마디가 제 가슴에 씨앗처럼 심겼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나는 사관학교에 가야 하는구나라는 신념이 흔들린 적이 없었습니다. 이후 대구 청구고등학교로 유학을 가서 대도시의 화려함에 잠시 위축되기도 했지만, 사관학교 진학이라는 목표만큼은 확고했지요. 대학 입시 때 서울의 우수한 대학들에 합격했음에도 망설임 없이 육군사관학교 43기로 입교한 것은, 어쩌면 영주 시절부터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이었습니다.

 

Q. 대령 시절 레바논 평화 유지단(동명부대) 단장으로서 보여주신 활동은 지금도 ‘PKO의 전설로 불립니다. 타국에서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이기 위해 장군님께서 고수하셨던 원칙은 무엇이었습니까?

A.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원칙은 바로 겸손입니다. 통상 해외 파병을 가면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를 돕게 됩니다. 이때 장병들이 현지인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태도를 보이기 쉬운데, 이는 현지인들의 지지를 잃게 되고 결국 작전의 실패로 이어지는 원인이 됩니다. 미국이 이라크 자유작전을 시행하면서 압도적인 전투력으로 불과 40일만에 이라크 전 지역을 석권했지만, 종국적으로는 이라크전에서 실패했습니다.

 

 

저는 레바논 사람들에게 항상 "대한민국이 6.25 전쟁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레바논은 우리에게 5만 달러를 지원해 주었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제공하는 도로 포장과 컴퓨터 기부는 당시 레바논이 우리에게 준 소중한 도움에 비하면 아주 작은 보답일 뿐이라고 겸손하게 다가갔습니다.

 

 

이런 진심이 통하자 현지의 헤즈볼라나 주민들이 다른 유엔 파병국은 공격해도 우리 한국군 부대만큼은 한 번도 공격하지 않았고, 오히려 뜨겁게 환영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국익 선양이자 평화 유지의 본질이라 믿습니다.

 

Q. 2018, 한국군 최초로 미8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셨을 때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당시 임명 과정과 임무 수행 중 가장 중점을 두셨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A. 당시 미8군사령관이었던 마이클 빌스 장군이 제가 한미연합사단 부사단장으로 근무하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8군에도 반드시 한국군 장군이 필요하며, 그 적임자는 바로 당신이다"라고 제 사무실을 네 번이나 찾아오는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했습니다. 원래 저는 유엔 PKO 사령관으로 진출할 계획을 세우고 인터뷰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동맹의 강화를 위해 미8군행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미군은 보통 1~2년 단위로 순환 근무를 하기 때문에 한국의 문화와 군사적 특수성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교육하고, 한국군이 가진 강력한 전투 역량을 이해시키는 문화적 가교역할에 집중했습니다. 단순히 지휘 체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군 장성들이 한국 사회와 원만히 소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저의 핵심 임무였습니다.

 

Q. 주한미군과 지역 사회 사이의 첨예한 갈등을 해결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특히 2017년 장갑차 추돌 사고 당시의 중재 사례가 인상적인데, 장군님만의 갈등 해결 노하우가 있습니까?

A. 갈등 해결의 핵심은 상대방의 문화를 존중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것입니다. 2017년 의정부에서 미군 장갑차와 민간 차량이 추돌하여 한국인 운전자가 사망한 사고가 있었습니다. 자칫하면 제2효순이·미선이 사건처럼 반미 감정이 격화될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었죠.

 

 

저는 즉시 미군 지휘부를 소집해 한국의 장례 문화(3일장)를 설명하고, 진심 어린 사과와 보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득했습니다. 제 사무실에서 장례식장에서의 절차와 유가족에게 사과하는 방법까지 연습시킨 뒤, 이튿날 바로 장군들을 대동하고 장례식장을 찾았습니다. 장군들이 눈물을 흘리며 진심으로 사죄하는 모습에 유가족들의 마음도 열렸고, 큰 사회적 갈등 없이 원만하게 마무리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갈등 해결은 기술이 아니라, 상대방의 아픔에 공감하고 진심을 전달하는 중재자의 역할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Q. 장군께서는 미8군 초대 한측 부사령관으로 재직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역 후에 초대 미8군의 정치군사고문으로도 재직(6년 재직, 202511월 퇴직)하셨습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이 주도적인 안보역량을 갖추기 위해 한미동맹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현대화되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A. 한미동맹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와 키 리더간의 상호 신뢰입니다. 아시다시피, 한미동맹은 한국전쟁을 통해 피로 맺어진 동맹입니다. 그러나 국가와 국가 간에는 상호 이익에 기반을 두지 않으면 국가관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1.2차 세계대전과 현대를 통해 통상적으로 국가 간의 동맹은 9.5년이었습니다. 10년을 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국가와 국가간의 친분은 이념, 동맹의 굴레보다는 이익에 기반을 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미동맹은 70년을 이어오고 있는 세계사에 있어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동맹이지요. 그렇다고 동맹이 산소와 같이 항상 함께 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상호보완적인 동맹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지향성을 가져야 합니다.

 


1). '신뢰'에 기반한 동맹 관리와 책임 분담

진정한 동맹은 권리만큼 책임도 함께 져야 합니다. 방위비 분담금 등 비용 측면에서 논란이 생기지 않도록, 우리가 기여하는 부분(세계적 수준의 기지 제공, 한국군 전력 강화 등)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되, 동맹의 유지비용을 '매몰 비용'이 아닌 '안보 보험료'로 인식하는 합리적 태도가 필요합니다.

2) '가치 공유'에 기반한 지역 안보 네트워크 확장

한미동맹은 이제 한반도라는 지리적 한계를 넘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으로 진화해야 합니다. 한미일 3국 간의 정보 공유, 공동 훈련을 정례화하여 북중러 밀착에 대응하는 강력한 '안보 보루'를 구축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과거사를 넘어 미래의 생존을 위한 전략적 선택입니다. 또한 쿼드(QUAD)와의 협력 확대 등 인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는 데 있어 한국의 역할을 증대시켜 미국 내에서 '한국은 대체 불가능한 동맹'이라는 인식을 확고히 심어주어야 합니다.

3). '과학기술 동맹'을 통한 압도적 우위 확보

미래 전쟁은 머릿수가 아닌 첨단 기술의 싸움입니다. AI, 양자 컴퓨팅, 우주 안보 분야에서 미국과의 공동 연구 및 개발을 심화해야 합니다. 미국 기술과의 상호 운용성(Interoperability)을 극대화하여 연합 작전 능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켜야 합니다. 또한, 한국의 우수한 방산 제조 능력과 미국의 원천 기술을 결합하여 '한미 방산 공급망'을 구축함으로써, 동맹 전체의 군사적 지속 능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Q. 다시 고향 이야기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최근 영주는 첨단 산업과 로컬 문화의 조화를 꾀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무대에서 활동하신 시각에서, 영주가 세계와 연결된 매력적인 도시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A. 저는 영주의 지리적 여건과 역사적 자산을 활용해 파격적인 도전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대구 도심의 미군 부대를 영주로 이전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용산 미군 기지가 평택으로 가면서 평택 인구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듯이, 미군 부대가 영주에 들어온다면 전 세계 안보·경제 전문가들이 영주를 찾게 될 것입니다. 이는 영주가 국제 도시로 도약하는 거대한 모멘텀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선비 정신의 세계화가 절실합니다. 부석사와 소수서원을 잇는 풍광 속에 외국인들이 선비 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고품격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합니다. 산업적으로는 안정 비행장을 활용해 드론 산업의 메카로 성장시켜야 합니다. 드론은 현대전과 산업의 핵심이며, 규제가 적은 영주의 이점을 살린다면 세계적인 군수 산업의 중심지가 될 수 있습니다.

 

Q. 장군님께서 생각하시는 '영주다움'이란 무엇이며, 후배들이 세계 무대에서 어떤 자세를 갖기를 바라십니까?

A. 영주다움은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선비 정신입니다. 겉으로는 겸손하고 조화롭되, 안으로는 국가와 정의를 위해 타협하지 않는 강인함을 갖추는 것이죠.

우리 영주의 후배들이 세계 무대로 나갈 때 두 가지를 꼭 기억했으면 합니다. 하나는 자긍심입니다. 선비의 후예라는 뿌리 깊은 자긍심이 여러분을 당당하게 만들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글로벌 시민 의식입니다. 제가 레바논에서 배운 것처럼,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겸손한 태도가 결국 세계인의 마음을 얻고 여러분을 진정한 리더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Q. 마지막으로, 앞으로 장군님의 전문성을 고향과 국가를 위해 어떻게 나누실 계획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A.  저는 육사 입교 이후 33, 그리고 퇴역 후 고문직까지 포함해 평생을 국가와 군을 위해 봉사해 왔습니다. 이는 제게 무한한 영광이자 보람이었습니다. 저를 태어나게 하고, 제가 어려울 때마다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 것은 언제나 영주였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저를 키워준 고향 영주를 위해 봉사하고 싶은 바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가진 안보 전문성과 글로벌 네트워크, 소통의 경험들이 영주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기꺼이 헌신할 생각입니다. 영주의 리더들과 시민들이 힘을 합쳐 영주를 세계적인 명품 도시로 만드는 그 여정에, 저 김태업도 서포터이자 조언자로서 언제나 함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향의 정을 품고 세계를 지키는 영원한 군인

김태업 장군과의 인터뷰 내내 느껴진 것은 군사 전략가로서의 날카로운 통찰력 뿐만 아니라 그 바탕에 깔려있는 고향과 사람을 향한 따뜻한 진심이었다. 그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미사일이나 탱크가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겸손신뢰라고 말한다. 레바논의 거친 모래바람 속에서도, 8군의 복잡한 외교 현장에서도 그를 지탱한 것은 어린 시절 영주의 우물가에서 배웠던 공동체 의식과 부모님의 엄격한 가르침이었다.

그는 한국군 장성 최초로 미8군 부사령관이라는 영예를 안았지만, 여전히 자신을 "서천교에서 피라미 잡던 영주 소년"으로 기억한다. 세계 안보의 중심에서 대한민국의 목소리를 당당히 내고 있는 그의 시선은 이제 다시 소백산 자락의 고향 영주를 향하고 있다.

김태업 장군이 걸어온 길은 영주인이 세계 무대에서 어떻게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정표와 같다. 그의 안보 전문성이 영주의 미래 비전과 만나 어떤 시너지를 낼지 기대되는 이유다.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이 곧 애국의 시작임을 몸소 보여준 김태업 장군, 그의 앞날과 그가 꿈꾸는 글로벌 영주의 미래를 링크영주가 함께 응원한다.


 

학력 및 주요 수료

영주서부초등학교 졸업

청구고등학교 졸업 (17)

육군사관학교 사학 학사 (43)

한성대학교 국제대학원 전략안보학 석사

워싱턴 국제대학교 국제정치학 박사

유엔 평화유지활동국(DPKO) 현장임무단 고위급 과정(SMLC) 이수 (한국군 두 번째)

주요 군 경력 (1987~2019)

임관: 1987년 보병 소위 임관

해외 파병: 인도·파키스탄 유엔 군사감시단 공보장교,
  
이라크 다국적군 민사작전장교,
  
아프가니스탄 전쟁 지원 한국군 연대 G3 등 역임

지휘관: 레바논 평화 유지단(동명부대) 단장

한미 연합 작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보좌관,
   
지구사 작전처장, 연합사 기획참모차장,
   
한미연합사단 한국측 부사단장

최종 보직: 주한미군 제8군사령부 부사령관 (한국군 최초 임명)
전 주한미군 제8군사령부 정치·군사 고문 
    서울사이버대 특임교수
    국방부, 육군본부 정책자문위원

 한국국방외교협회 평화유지센터장
    육군협회 자문위원
    USD 자문위원
    평택 안보 포럼 대표
    서울시 안보정책자문위원

주요 상훈

보국훈장 삼일장
대통령 표창 (2)
미 국방부 장관 훈장
평택시 명예시민 위촉

김소영 기자 (iybc365news@naver.com)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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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0
  • 아무개
    2026- 03- 07 삭제

    사랑해요 김태업 💙💙💙

  • 20260128
    2026- 01- 29 삭제

    고맙습니다. 그리고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