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던 근대기 거장의 예술 세계를 마주하는 일은 시대를 넘나드는 깊은 울림을 준다. 대구·경북 근대 미술의 역사를 살피다 보면 문득 눈길을 사로잡는 이름이 있다.
바로 영주 출신의 작가 목부(牧夫) 권진호(權振浩, 1915~1951)다. 그는 섬세한 감성으로 풍경과 인간을 포착하고 회화의 본질을 탐구했던 영주 최초의 모더니스트였다.
권진호는 1915년 6월, 현재의 영주시 부석면 임곡(숲실)에서 부농이었던 아버지 권창동(權昌東)과 어머니 전주 최씨 사이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1929년 부석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부친의 뜻에 따라 대구농림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미술반이라는 특활 부서로 이끌었다. 타고난 소질이 뛰어났던 그는 1학년(15세) 때 이미 매우 능숙한 필치의 수채화 「거리 풍경」(대구거리, 1930)을 남겼다. 흥미로운 점은 이 그림 속 상점마다 걸린 국기가 일장기가 아닌 태극기라는 사실인데, 이는 해방 후 작가가 직접 가필한 흔적으로 조국에 대한 마음을 엿보게 한다.

외동아들의 유학 시절 연애 소문을 염려한 부친의 주선으로 두 살 연상의 아내 금필교와 일찍 살림을 차린 와중에도 그의 예술적 자부심은 대단했다. 졸업앨범 속 이젤 앞에서 붓을 든 당당한 포즈와 표정이 이를 증명한다.

그의 조숙한 필력은 곧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3학년 때 제3회 전조선남여학생작품전에서 「소장(素粧)의 추(秋)」로 입선한 데 이어, 졸업반이던 1934년에는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조선미전)에 수채화 혹은 유화로 추정되는 「계림의 초춘」을 출품해 당당히 입선의 영광을 안았다.
계림의 초춘(1934)
당시 화가이자 논객이었던 송병돈은 칼럼을 통해 "빛깔에 자미(滋味)가 있고 구도도 상당하나 색조가 냉랭하고 경계의 원근 묘사나 뎃생이 무기력하다"며 장식적·낭만적 경향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술평론가 김영동은 이 시기 그의 작품에 대해 '자신감 있는 단속적인 붓질과 일정한 방향으로 조직적인 터치를 구축한 점'을 높이 평가하며, 기량이 빠르게 발전하는 과정이자 화면의 리듬감을 구축한 결과물로 해석했다.
초기 수채화인 「대구 거리」(1930)나 「못이 있는 풍경」 등은 얇은 와트만지에 그려졌으며, 구도와 색감에서 대구 수채화의 거장 서동진의 영향이 짙게 드러난다.
이후 4학년(1933년)을 전후해서는 흰색을 가미한 불투명 기법을 혼용하기 시작했다. 비싼 와트만지 대신 마분지를 사용하면서 불투명 기법을 자연스럽게 습득했고, 단속적인 필법에서는 이인성의 영향도 관찰된다.
바이올린이 있는 정물(1933)
이 시기 그린 「바이올린이 있는 정물」(1933)은 사물 간의 시점보다는 구성미에 주안점을 둔 담채풍의 발랄한 작품으로, 훗날 대구미술관에 기증되었다. 이처럼 청년 권진호의 거침없는 붓끝은 이미 근대 화단을 흔들 신예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