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지 5년, 지방특별시포럼과 함께 다시 걸어본 고향
예술·창업의 현장에서 만난 영주의 새로운 가능성
부석사까지, 익숙한 장소에서 발견한 낯선 변화
나는 영주에서 시내버스를 탈 때 부산은행 카드를 사용한다.
5년 전 대학 진학을 위해 영주를 떠난 나는 주로 방학에 영주로 돌아온다. 그럴 때 교통카드로 사용하는 것은 부산의 마스코트 '부기'가 그려진 부산은행 카드이다. 부산에서 자취를 시작하며 전입신고를 하고 부산 시민이 된 후, 캐시백과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지역화폐 '동백전'을 발급했다. 그때 동백전 기능이 포함된 부산은행의 후불 교통카드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카드를 영주 시내버스에서 쓸 때마다 내가 부산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다가온다. 초·중·고를 영주에서 지내고, 타지로 대학 진학을 하는 것은 비단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의 고등학교 동창들도 대부분 타지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면 떠나간 아이들은 고향을 그리워할까?
이제 막 대학을 졸업했거나, 아직 재학 중인 내 친구들은 제각기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전국 각지로 흩어진 친구들의 소식은 주로 명절이나 방학에 오랜만에 만나서, 혹은 SNS를 통해 확인한다. 그럼 이 작은 도시에서 출발한 아이들이 얼마나 다양하게 사는지 알 수 있다. 다들 여고생 시절과는 사뭇 다르기도, 여전하기도 하다. 나 또한 이미 스스로를 그렇게 느끼는 중이다. 관사골의 여고를 다니던 내가 들으면 깜짝 놀랄 만큼 새로운 경험들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중 하나가 지난 5월 부산의 변화를 만들어갈 청년 커뮤니티 학교인 '이음 펠로우십'에 참가한 것이었다. 나는 이때 내가 재학 중인 부산대 앞 독립서점을 산책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만난 정원식 빌더님(지방특별시 포럼)의 제안이 다시 새로운 경험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지난 9월 11일 12일에 더영주 김소영 대표가 호스트가 되어준 '지방특별시포럼' 영주 답사이다.
◆ 익숙했던 곳, 내가 몰랐던 변화 - 영주시 도시재생센터
답사의 첫 일정은 영주시 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시작됐다. 센터는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관사골 바로 아래에 있었다. 수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오갔던 동네인데도 이런 공간이 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내가 관사골을 매일 같이 다니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에 들어간 2015년부터이다. 그리고 도시재생센터의 개소도 2015년이었다. 6년간 이곳에서 교복을 입고 언덕을 오르내렸는데도 몰랐다는 점이 아쉽기도 하고, 또 바로 내 근처에서 영주의 변화를 기획하는 곳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로워서 센터의 사업 소개를 귀담아들었다.
영주는 1970년대 철도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하며 한때 인구 18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교통의 중심이 철도에서 도로로 옮겨가고 영주역까지 이전하면서, 역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구시가지도 점차 활기를 잃었다. 도시의 인구는 11만 명 수준까지 줄었고, 구도심에는 고령 인구의 비율이 높아졌다. 이에 영주시는 2014년부터 이 일대를 도시재생 사업지로 선정하고, 행정기관과 전문가, 주민이 함께하는 선도 사업 '역전(驛前)을 역전(逆轉)'을 추진했다. 도시재생지원센터는 이 과정에서 주민의 의견을 모으고 행정 및 전문가와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2014년 사업이 끝난 후에도 여러 사업들을 수행해 오고 있다.
사업 설명을 들은 후에는 2014 사업 대상지였던 후생시장과 중앙시장을 방문했다. 이 일대는 영주 사람들이 '시내'라고 부르는 곳이다. 나는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논다면 시내에서 만났었다. 그 당시에는 각종 음식점이나 가게가 시내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교 후 여고생들끼리 시내에 가서 떡볶이를 사 먹거나 문제집을 사러 서점에 가는 풍경이 아주 흔했다. 그런 추억들을 떠올리며, 소백산게스트하우스, 근대역사체험관, 중앙시장 어울장터를 둘러보았다.
◆ 영주에서 예술하기, 소백산예술촌
내가 어릴 때 영주에서 기억하는 영화관은 시내의 예당시네마 한 곳뿐이었다. 우리 가족은 영화관에 자주 가지 않았고, 나 역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문화와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자랐다. 그런데도 나는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영화가 나오면 넋을 놓고 화면을 바라보곤 했다. 접근할 수 있는 문화예술 공간이 많지 않았던 당시 영주에서, 텔레비전은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만나는 가장 가까운 창구였다.
이 이야기를 길게 꺼낸 것은 소백산예술촌에서 만난 조국원 대표의 어린 시절이 나의 경험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조 대표는 공연 한 편을 보기 위해 몇 시간씩 버스를 타고 타지로 향했다고 했다. 공연이 끝나는 시간과 영주행 버스 시간이 맞지 않아 막차를 놓치고, 아는 형에게 연락해 하룻밤을 묵은 적도 있었다. 보고 싶은 공연이 있어도 영주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정도와 방식은 달랐지만, 그것은 나 역시 어린 시절 느꼈던 문화적 갈증과 맞닿아 있었다.
공연예술은 현장에 기반한다. 화면으로 기록하고 전달할 수는 있어도, 같은 공간에서 배우의 움직임과 목소리를 마주하는 경험을 완전히 대신하기는 어렵다. 그와 비슷한 예술 경험인 미술 전시를, 나 역시 부산에 온 뒤에야 경험하기 시작했다. 스물한 살에 부산시립미술관에서 관람한 《한국현대미술작가조명 IV-이형구》는 내가 처음으로 제대로 경험한 미술관 전시였다. 작품 앞에 직접 서고 전시장을 걸으며 느끼는 감각은 집에서 화면으로 접하는 것과 달랐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올해 7월에는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의 청년인력양성사업에 참여해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ㅂㅅ: 비워진 이름, 다시 쓰는 부산》을 함께 열었다.
전시를 보러 다니는 일조차 낯설었던 내가 다른 사람에게 예술을 경험하는 자리를 만드는 일을 해본 것이다. 그래서 조 대표의 이야기가 더욱 가깝게 다가왔다. 정도와 방식은 다르지만, 나 역시 예술을 접하는 사람에서 예술 경험을 만드는 사람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 영주에서 누리지 못했던 문화적 경험을 기다리는 데 그치지 않고, 조 대표는 그것을 고향에서 직접 만들어왔다. 소백산예술촌은 그 고민이 현실의 공간으로 이어진 곳이었다.
조 대표는 2019년, 지역의 문화 환경을 직접 바꾸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동료 예술가들을 영주로 초대해 '낭만주의'라는 이름의 모임과 역량 강화 워크숍을 시작했고, 이 만남은 문화예술단체 '클라우드컬처스'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지역 아동을 위한 연극 캠프와 학교 예술동아리를 운영하고, 마을 공연과 문화 프로그램을 열며 지역에서도 예술가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왔다.
문화예술 활동을 이어가는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2025년에는 사용하던 공간이 매각될 위기에 놓였지만, 지역 기업의 후원과 주민들의 응원으로 영주시 이산면의 폐교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다. 청년들은 오랫동안 비어 있던 학교를 직접 고치고 가꾸었다. 그렇게 다시 문을 연 소백산예술촌은 청년 예술가들의 작업 공간이자, 지역민과 예술을 만들고 나누는 청년마을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공연과 전시, 교육과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청년에게는 창작과 정착의 가능성을, 지역에는 새로운 문화적 활력을 더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조 대표는 공연 한 편을 보기 위해 몇 시간씩 버스를 타고 영주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영주의 아이들이 예술을 만나기 위해 반드시 도시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들고 있었다. 소백산예술촌을 방문하고, 나는 내 고향 영주에 조 대표 같은 분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라게 되었다.
◆ 청년의 가능성을 쌓는 곳, STAXX
세 번째로 방문한 곳은 경북전문대학교 간호학과의 옛 기숙사 건물을 리모델링한 STAXX(스택스)였다. STAXX는 '쌓다'라는 뜻의 영어 단어 'stack'에서 이름을 따왔다. 지역에서 새로운 가능성과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간다는 의미가 공간의 이름에 담겨 있었다.
STAXX는 지역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더할 청년 창업가를 지원하기 위해 조성된 공간이다. 영주에 생산공장을 둔 SK스페셜티가 공간 조성에 필요한 재원을 지원하고, 영주시가 선발한 스타트업을 액셀러레이터 임팩트스퀘어가 육성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입주 기업을 위한 공유 오피스뿐 아니라 지역을 찾은 청년들이 머물 수 있는 숙박공간과 다양한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었다.
공간에 들어선 첫인상은 '영주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는 놀라움이었다. 오래된 기숙사였다고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내부는 세련되고 감각적이었다. 잘 꾸며진 디자인 스튜디오나 서울과 부산에서 보았던 공유 오피스에 들어온 듯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놀라움에는 영주를 오래되고 변화가 더딘 도시로만 바라보고 있던 나의 선입견도 섞여 있었다. 고향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영주를 떠난 이후 생겨난 변화들을 거의 알지 못했다.
앞서 방문한 도시재생지원센터가 주민과 함께 쇠퇴한 구도심의 활기를 되찾고, 소백산예술촌이 지역에서 예술가로 살아갈 가능성을 만들고 있었다면, STAXX는 청년들이 영주에서 자신의 일을 시작하고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영주를 떠난 친구들을 생각했다. 청년이 고향을 그리워한다고 해서 그 마음만으로 다시 돌아와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고 새로운 시도를 해볼 기회가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STAXX는 단순히 세련된 공유 오피스가 아니라, 청년들에게 영주를 떠나는 것 외의 선택지 중 하나를 보여주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 관사골에서, 초가을 아침
둘째 날의 첫 일정은 관사골 4호관사에서 진행된 웰니스 프로그램이었다. 이곳은 전날 방문한 도시재생지원센터보다도 내가 다닌 중·고등학교와 가까웠다. 언덕을 따라 5분 정도만 걸어 올라가면 두 학교가 나온다. 그러나 4호관사 역시 내가 교복을 입고 오가던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공간이 아니었다. 학교와 아주 가까운 곳인데도, 내게는 졸업 후 새롭게 생겨난 장소였다.
관사골은 1942년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철도 종사자들의 주거 공간인 관사가 들어서며 형성된 마을이다. 이러한 관사의 역사와 공간을 바탕으로 '아침'이라는 일상을 매개 삼아 사람과 마을을 잇는 로컬 브랜딩 사업이 '굿모닝! 관사골'이다. 2025년 시범 사업을 거쳐 요가와 체조, 스토리 워킹, 지역 식재료를 활용한 식사 등의 프로그램으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참여한 것은 잔디 위에서 진행되는 아침 요가였다. 머리 위에는 햇빛을 가려주는 차양이 펼쳐져 있었다. 차소연 대표의 동작을 힘겹게 따라가다 마지막에는 매트 위에 누워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몸의 움직임을 멈추고 나니 그제야 초가을 아침의 바람과 주변의 새소리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작은 새들이 차양 아래로 날아드는 걸 바라보기도 했다. 아직 더운 초가을이었지만, 빵빵거리는 차 소리나 분주함 없는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요가를 마친 뒤에는 지역 해설사와 함께 관사골을 걷는 스토리 워킹에 참여했다. 골목의 벽화와 오래된 관사의 흔적을 살펴보며 부용대까지 올라갔다. 부용대에 서자 영주의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해설사 분이 현재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의 기숙사 사감으로 근무하시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내가 졸업한 뒤 부임하셨기 때문에 학교에서 만난 적은 없었지만,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모교와의 인연을 발견한 것이 신기했다. 해설을 들으며 걷는 동안 이 언덕을 오르내리던 시절의 기억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스토리 워킹을 마치고 다시 관사로 돌아와 '오늘의 관사골'이라는 이름의 점심 식사를 했다. 식탁에는 영주 지역의 식재료를 활용한 음식이 놓였다. 경북 북부 지역에서 즐겨 먹는 문어와 채썬 인삼, 영주산 달걀로 만든 샌드위치 등이었다. 새롭게 문을 열 예정인 4호 관사에 둘러앉아 지역의 재료로 만든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까지가 이날의 웰니스 프로그램이었다.
◆ 몸을 낮춰 다시 만난 부석사
답사의 마지막 일정은 부석사였다. 부석사는 이번 답사지 가운데 내게 가장 익숙한 곳이었다. 가족들과도 오고, 초·중·고 현장학습으로도 여러 차례 방문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반복해서 걸었던 길이어서 새롭게 알 것이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해설을 들으며 오르니 익숙한 길에서도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부석사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은 모두 108개라고 한다. 계단의 경사가 가팔라 오르다 보면 자연스럽게 상체를 앞으로 숙이게 되는데, 그렇게 한 계단씩 오르는 모습이 마치 108번 절을 하는 것과 같다는 설명이었다. 여러 번 이 길을 올랐지만 계단의 수를 세어본 적도, 내가 몸을 숙이고 걷고 있다는 것을 의식해본 적도 없었다. 익숙해서 잘 보지 않았던 것 같다.
부석사의 계단을 오르는 일은 이번 답사에서 내가 영주를 다시 바라본 방식과 닮아 있었다. 익숙한 도시도 몸과 시선을 조금 바꾸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알지 못했던 사람과 공간, 새로운 움직임이 보였다.
이번 답사를 통해, 낯익고 낯선 영주를 경험했다. 글을 시작하며, 나는 '떠나간 아이들이 고향을 그리워할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마찬가지로 떠난 사람인 나부터 말하자면, 영주를 그리워한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본 밭과 산의 풍경, 산비둘기 소리, 친척이 모두 모인 할머니집, 영주의 추위, 노을 지는 서천, 동네 도서관, 자주 먹던 음식들, 모교와 학원, 부모님과 친구들. 이 모든 것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친구들 역시 나와 같은 방식으로 영주를 그리워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돌아오려는 친구도 있고, 돌아오지 않으려는 친구도 있을 것이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이유와 삶이 있다. 무엇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그곳으로 돌아와 살아가는 것은 다른 문제다. 누군가 지역으로 돌아오려면 추억뿐 아니라 하고 싶은 일과 문화, 관계와 생활의 기반이 필요하다. 이번 답사에서 만난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바로 그 가능성을 만들고 있었다.
앞으로도 나는 영주에서 버스를 탈 때 '부기'가 그려진 부산은행 카드를 사용할 것이다. 카드를 단말기에 댈 때마다 내가 부산 시민이라는 사실과 영주가 고향이라는 사실이 교차할 것이다. 나는 앞으로 어느 도시에서 살아가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도시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고향과의 관계까지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리움은 반드시 돌아와 사는 것으로만 증명되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멀리서도 고향의 소식을 궁금해하고, 돌아올 때마다 달라진 모습을 살피고,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관계를 이어가는 것 역시 고향을 사랑하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